“참여자의 주관적 ‘만족’이 아닌 자원의 ‘자연스러운 배분’을 통해 공정분배를 이루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평형상태에 있는 물리계가 가장 높은 확률로 자연스럽게 따르는 ‘볼츠만 분포(Boltzmann distribution)’를 적용한 완전히 새로운 분배원칙입니다.”
김채운‧김재업‧김철민 물리학과 교수팀이 울산대 경제학과 박지원 박사와 함께 ‘물리학 원리에 착안한 공정분배원칙’을 고안했다. 통계물리학의 볼츠만 분포에 기반한 것이라 ‘볼츠만 공정분배원칙(The Boltzmann Fair Divisi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김채운 교수는 “한정된 자원의 분배 상황에서 서로 다른 상황에 놓인 이해당사자 모두를 만족시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며 “참여자의 주관적 ‘만족’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합리적인 ‘분배의 원칙’이 나오기 어렵지만, 관점을 바꾸어 ‘자원의 자연스러운 분포’가 공정의 기준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고 경제학의 분배 개념에 물리학을 적용한 까닭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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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가장 왼쪽)가 케이크를 나누려 할 때,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왼쪽 두 번째)가 손을 잡고 다시 생각해볼 것을 권하고 있다. 인류에게 기여한 바가 많은 폰 노이만(왼쪽 세 번째)과 99%를 대변하는 어린이가 모두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분배해야 공정할지 고민해보면 답이 쉽게 내려지지 않는다. | 그림: 박지원 박사
볼츠만 분포는 물리계가 열적인 평형상태에 있을 때, 그 물리계에 속한 원자나 분자가 가장 높은 확률로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에너지 상태 분포를 나타낸다. 일정한 온도로 맞추어진 방안에 존재하는 공기 분자의 속력 분포도 볼츠만 분포에 기반하고 있다. 볼츠만 분포가 내포하는 ‘자연스러운 분배’의 개념을 경제학에 도입하면 공정분배원칙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연구진은 볼츠만 분포에서 사용되는 물리학적인 개념인 ‘입자(P)’, ‘에너지 상태(e)’, ‘에너지 값(E)’을 공정분배에서 고려돼야 하는 경제학적인 개념으로 치환했다. 입자는 ‘한정된 자원(P)’으로, 에너지 상태는 ‘참여자(e)’로, 에너지 값은 ‘참여자의 자원 생산에 대한 기여도(E)’로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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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적용하면, 한정된 자원이 참여자의 기여도에 따라 가장 자연스럽고 공정하게 배분되도록 설계된다. 박지원 박사는 “참여자의 기여도나 취향 같은 현실적인 요인들을 반영해 자원을 배분하는 볼츠만 공정분배원칙은 ‘사회적 온도’의 개념을 내포하는 상수(β값)에 의해 분포의 퍼짐 정도가 결정된다”며 “이 상수 값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철학과도 결합해 최적화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채운 교수는 “볼츠만 공정분배원칙에 내포된 ‘사회적 온도’의 값이 크면 참여자에게 폭넓게 자원이 배분되는 따뜻한 공동체가, 반대라면 소수의 참여자가 자원을 독식하는 냉혹하고 차가운 사회가 된다”라며, “우리 사회가 보다 따뜻한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정책 수립 등에 기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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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츠만 공정분배원칙을 적용하면 각기 다른 맛을 가지는 케이크를 나울 때 참여자의 선호도를 고려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번 연구에서 고안된 볼츠만 공정분배원칙은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다수의 참여자에게 한정된 자원을 배분해야 하는 다양한 복잡한 문제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일반화돼 고안됐다. 자본주의 체제에 주요한 문제점인 ‘극단적인 부의 양극화 현상’을 완화하거나 국제적인 협력이 필요한 ‘기후변화 문제 대응 분담’ 해결에도 시사점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연구는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으며, 연구 결과는 ‘사이언티픽 리포트 (Scientific Reports)’에 발표됐다.
김채운 교수와 1문 1답
Q1. 경제학에서도 풀기 어려운 ‘분배’를 연구하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A1. 2020년에 미국으로 연구년을 다녀왔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지 3주만에 코로나19가 퍼지면서 전 세계에 난리가 났죠. 경제활동이 멈추면서 실직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반면 주식, 부동산 등의 자산 시장은 폭등하는 기이한 현상을 직접 보게 되었죠. 이때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경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경제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생산’하고, 이를 ‘분배’해 ‘소비’하는 모든 활동을 일컫습니다. 경제학 교과서에도 나온 개념인데요. 이 중 ‘생산’과 ‘소비’는 심도 있는 연구가 이뤄졌지만, 많은 경우 갈등의 씨앗이 되는 ‘분배’에 대해서는 합리적이면서 공정한 원칙이 없었습니다. 공기처럼 모두가 충분히 나눌 수 있는 건 문제가 없지만, 한정된 자원을 나누려면 싸움이 생길 수밖에 없고, 현실적으로 이해당사자들을 모두 만족시키면서 분배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경제학에서조차 합리적인 ‘분배의 원칙’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무언가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Q2. 기존에 나왔던 분배 이론들은 어떤 방식이었나요?
A2. 수학적 차원에서 제시된 분배 이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론들은 몇 가지 비현실적인 가정이 포함돼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동일하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정직하다’라고 가정합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고 원칙을 지키면서 분배한다는 것인데요. 현실 세계에는 타당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다음으로 ‘모두가 분배의 전 과정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가져야 한다’는 가정도 합니다. 그래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인데요. 이 역시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정치철학적 측면에서도 분배의 원칙이 존재하는데요. 첫 번째는 완전한 자유주의식 분배, 즉 경쟁을 통해서 우위에 있는 사람이 무한정 가질 수 있는 분배 방법입니다. 사회의 역동성은 유지될 수 있지만, 약자들이 소외되고 자원의 양극화가 심해져 사회의 불안정성이 커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모토로 하는 공리주의나 약자의 복지를 강조하는 점진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분배 방법입니다. 경제성장과 사회 안정성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는 분배 방법으로 보이지만 자원재분배에 대한 구체적인 원칙을 제시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저희가 제시한 볼츠만 공정배분원칙은 그 기준을 제시해 준다 생각합니다.
Q3. ‘볼츠만 공정분배법칙’은 ‘자원이 저절로 나누어지는 계산법’처럼 들립니다.
A3.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분배는 없습니다. 공기처럼 자원이 남아돌지 않는 이상은요. 그러니 한정된 자원에 대한 공정분배의 기준을 모든 사람의 만족에 두면 해답을 구할 수 없게 되죠. 저희는 ‘완전히 새로운 분배 이론’을 만들기 위해 분배 과정에서 사람의 주관적인 감정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나눠야 하는 자원에 초점을 두고,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게 배분되는 원칙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물리학의 ‘볼츠만 분포’와 맞닿은 점입니다.
볼츠만 분포는 자연계가 따르는 분배 법칙입니다. 이 원리를 잘 이용하면, 한정된 자원이 기여도나 취향을 반영해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배분되도록 할 수 있다고 봤죠. 예를 들어 회사에서 수익이 난 금액이 있다면, 각 구성원의 기여도에 따라서 저절로 몫이 계산되는 아주 자연스러운 방식입니다. 열적 평형상태에서 입자의 분포는 엔트로피가 극대화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특정 온도마다 가장 자연스러운 분포가 있고, 온도가 바뀌면 전체 분포도 바뀌게 되죠. 물리학에서의 온도 개념을 경제학의 볼츠만 공정분배법칙에 적용하면 ‘사회적 온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온도가 높다면 다수가 거의 비슷하게 받을 것이고, 반대로 낮다면 소수가 대부분을 가지는 구조가 되는 겁니다. 정책결정자는 각 사회의 상황에 따라 사회적 온도를 다르게 설정해 자원의 전체 분배를 조절하면 됩니다.
Q4. 물리학자로서 경제학 분야를 연구하면서 좋았던 점이 있을까요?
A4. 물리학 법칙들을 이용해 경제 현상을 설명하는 사례는 앞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책 결정을 위해 물리학 원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경우는 드물 거예요. 특히나 분배에 대해서는 복잡하고 갈등이 첨예한 현실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물리학에 근거한 공정분배원칙을 제시할 수 있어서 뿌듯한 마음이 듭니다. 이번 논문은 통상적인 물리학이나 경제학 논문과는 달라서 논문 심사를 맡아줄 에디터를 찾는 데 애를 먹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리뷰어(Review)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여서 통과는 수월했습니다. 경제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설득력이 없다고 할까봐 살짝 걱정했는데, 대체로 ‘새롭고 흥미로운 연구’로 인식하는 듯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연구는 다른 사람들의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닌 저희만의 원천적인 아이디어에 기반한 것이어서 애착이 깊습니다. 볼츠만 분포를 분배에 적용하려는 발상은 제가 경제학자가 아니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이미 수많은 학자가 많은 업적을 이루어 놓은 경제학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였다면 기존 학문의 내용에 함몰되어 새로운 관점을 갖기 어려웠을 겁니다. 다행히 저는 물리학자이다 보니 아주 새로운 시각에서 분배 문제에 접근해 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이 공정분배원칙을 더 발전시켜 나가고 싶습니다.